어느날 학교에서 소녀가 물었다 G의 관측서


너는 판타지를 좋아하는가?

괴물이 나오고, 검을 휘두르며, 마법이 튀어 나른다.
그곳에는 꿈이 있고, 희망이 있고, 로망과 낭만도 존재한다.
모두가 동경하는 세계. 한 번쯤 가보고 싶은 곳. 그러나 갈 수 없는 장소.

허나, 기뻐해라. 바라지 마지못한 그것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

단지, 꿈이고 희망이고 나발이고 없다는 것이 문제지만......

 

'그것'들은 울부짖었다.
도무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괴성. 위압과 공포를 담아 단지 내 어지르는 외침.

떨린다. 그 고함에 공기가 떨리고, 유리가 떨리고, 온몸이 떨린다.

괴물, 괴수, 요괴, 몬스터─

글로서, 그림으로서, 영상으로서 인간의 적으로, 때로는 인간의 친구로 표현되고 묘사되는 것들.
어째서인지 그런 환상에서 뛰쳐나온 괴물들이 운동장에 넘쳐 흐른다.

"....꿈인가?"

물론, 빌어먹지만 현실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이거."

당연, 뭣도 아닌 내가 이유를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알 수 있는 건, 아는 건, 매우 단편적인 사건들.

어느 순간 검게 물든 하늘.
학교 담장 너머로 뿌옇게 끼기 시작한 안개.
일그러지고 비틀리는 허공.
상황을 인지한 교내의 떠들썩함.

단지 이 정도. 점심시간에 언제나처럼 훔친 열쇠로 옥상에 오른 내가 볼 수 있었고, 알 수 있었던 건 여기까지.
도무지 따라잡지 못할 상황. 그에 압도되어 혼란스러운 머리로 멍하니 운동장을 내려다보는 그즈음.
온갖 이형의 괴물들,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이렇게 중얼거린 건, 괴물들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한참이나 지나고서.
교내의 웅성거림이 고통과 공포로 뒤범벅된 절규로 바뀌는 것을 들으며.
운동장에서 배회하는 저 녀석들이 절대로 우호적인 놈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후.

나는 생각한다.

현 상황을 바라보고 두려워하고 떨면서, 그래도 냉정해지도록 노력하며,

나는 생각한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뻔하지, 도망쳐야 한다. 이건 생존을 위한 당연한 본능. 이렇게 계속 서 있기만 하다가는 언제 피투성이로 쓰러질지 모른다.
그러니까, 도망이다. 이 장소에서 벗어나 어디로든 안전하다고 판단되는 곳에 숨자.
저 괴물에게 맞선다는 발상은 만용이고 죽지 못해 발악하는 몸부림.
그러니 마음을 다잡고 용기를 내자.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그렇게 각오를 다잡으며 한 발짝, 다리를 옮겼다.

그 순간,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호쾌하게 열리는 육중한 철제문.

벌써 여기까지 온 건가?

머릿속에 스치는 생각에 순간 굳어버린 몸으로 옥상 입구를 바라보면 문턱을 넘어 나타난 건, 크고 검푸른 눈이 인상적인 '이웃집 소녀'.
소녀는 등장과 동시에 나를 보며 외쳤다.

"가자!"

그러고선 검은 단발을 사자 갈기처럼 휘날리며 다가와 다짜고짜 손을 잡아끌었다.
어라라? 하며 반응도, 반항도 하지 못하고 마냥 끌려가는 나 자신.
겨우 정신을 차리고 다리를 멈추면 소녀는 그 큰 눈망울을 깜박이며 뭐하냐는 듯, 나를 바라봤다.
너야말로 뭐 하는 거냐! 라고, 소리치고 싶은 심정은 꾹꾹 누르고 소녀를 뿌리치려고 잡힌 손을 턴다........안 풀린다. 재도전. 그래도 안된다.

몇 번이고 뿌리치려 하지만, 꽉 잡힌 손은 도무지 풀리지 않았다.
아무리 내가 체력이 약하다고는 하다만 동갑내기 여자애의 손도 뿌리치지 못하다니.
어쩐지 남자로서 비참한 심정에 얼굴이 구겨진다.

결국, 손을 빼내는 건 포기하고 더욱더 미묘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소녀에게 발끈하며, 마음속에 담아 둔 말을 소리쳤다.

"갑자기 나타나서 뭐하는 거냐! 이 바보 여자!!!"

"뭐하는 거긴. 죽기 싫다면 도망가야지?"

눈을 반짝이며 당연한 상식을 답하는 소녀. 그건 분명히 내가 방금 생각하던 거고, 이제 막 실행하려던 거다.
그러니 이대로 따라가도 상관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그게 그렇지 않은가, 막상 무언가를 하려고 할 때 누군가 하라고 시키면 하기 싫어지는 거.
그래서, 나는 투정부리는 어린애 마냥 저항해본다.

"어디로, 사방이 괴물 천지인데? 뭔가 뾰족한 수라도 있는 거야?"

"없지. 그렇다고 멍하니 서 있다가 죽는 것 보단 낳잖니?"

당연하디당연한 답변이고 그게 진실이다. 반론할 수 없다만, 아직 궁금한 것은 남아 있다.

"그럼 혼자 가면 될 것이지 왜 여기까지 온 거야?"

근성이 이기적인 게 인간 아니던가?

"......아주머니가 너 꼭 좀 데려오래. 딴 길로 새지 못하게 감시하고......."

아주머니는 우리 엄마를 말하는 거겠지. 그보다 그 말은 이 상황이랑 상관없지 않나?─라는, 표정을 지어봤다.

"에이잇! 시끄럽고, 어서 따라왓!"

어째서인지 얼굴을 붉히며 강제적으로 내 팔을 잡아끄는 소녀. 납득 안 간다는 표정으로 끌려가는 나.
뭐가 뭔지.

 

어쨌건 저 쨌건 이제 이건 넘어가자.

 

소녀의 손에 이끌려 어두컴컴한 교내로 들어서 희미하게 보이는 계단을 한 걸음 조심스레 내려가다 보면, 제 기능을 못하는 눈을 대신하여
밝아진 귀가 지옥에서 들려올 법한 아우성을 끊임없이 잡아냈다.

그 마음속 공포를 자극하는 소리에 애써 강한 척을 해보지만, 가슴 한구석이 좀먹어 감을 느낀다─마음이 깎여간다.

그런 내 심정을 알아차린 건지, 아니면 자신도 불안했던지 따뜻하게, 그러나 아프지 않게 꼬옥, 쥐어지는 감각.
소녀의 손에서 느껴지는 따뜻함에 마음이 안정됨을 깨달았다.

다시 한 번 남자로서 한심하다고 생각됐지만, 일단 무시하자.

"그런데 바보 여자."

"왜, 멍청한 남자."

지금까지 보고, 현재 진행형으로 듣고 있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상상이 가고 짐작이 가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래서 묻는다.
부질없지만 현실이 아니길 빌며.

"....저 아래는... 어떻게 됐어?....."
 
"......."

질문에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소녀는 계단의 끝에 내려서며 딱딱하게 말했다.

".......직접 봐."

두려움과 호기심으로 복도 끝 모퉁이 너머를 바라본다.


               흔들흔들 불빛 아래 온통 붉은 공간.
   강렬한 붉음은 비린내 풍기는 인간의 피.
           공간 안에 널브러진 인간이었던 것들.
       산산조각이 난 파편을 아귀처럼 먹어치우는 기형의 괴물들. 
                         까득까득아작아작으적으적
                뼈 씹는 소리. 고기 씹는 소리.
 아파아파아파!!!살려줘살려줘살려줘!!!!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이건 아직 죽지 못한 자들의 여유로운 비명. 
                   펼쳐진 건 한 편의 정교한 지옥도.
       
                 계속 보겠는가?


후회하며 눈을 돌린다.

다시 치밀어 오르는 공포에 몸을 떨며 입을 막고 헛구역질했다.
골수 깊게 각인된 피 냄새에 정신이 혼미해진다.
이 무슨───.

"괴물들이 건물 안에서도 나왔었어. 수도 적고 대부분 크기도 작았지만 모두 제대로 저항도 못하고 죽었고.
 대체적으로 학교 전체가 이 상태야."

소녀는 무덤덤이 말했다. 제 일이 아니라는 듯, 브라운관 너머의 방관자처럼 혼잣말을 처럼 중얼거렸다.
그 모습이 이질적이라고 느낄 틈도 없이 걸음을 재촉당했다.

"계속 가자고...."

 

잡아끄는 손길. 주저없는 걸음에 이끌려 어둠을 헤치며, 멍하니 계단을 내려간다.
아직도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는 건지 비명과 고함은 끊이지 않고, 어딘가 이질적인 소음이 운동장 저편에서 들려오지만
내 정신은 온통 바로 전에의 지옥도에만 고정되어 있다.

그렇게 굉장히 현실적으로 다가온 죽음이라는 놈이 어깨를 짓누름에 흔들리며 걷다 보면 어느새 3층.
소녀는 곧바로 아무 말 없이 다음 계단으로 향하지만,

"여긴 못 내려가겠는데....."

계단은 부서져 있었다. 흔적조차 없는 계단의 어두컴컴한 저 아래에는 까드득, 뼈 갉아먹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뛰어내릴 수도 없겠네."

"그럼......"

누군가 내 얼굴을 본다면 귀신으로 착각할 만큼 새파랗게 질려 있을 것이다.
길은 없다. 복도는 괴물 천지. 옥상으로 다시 올라가는 것도 떠올려봤지만 내려오자마자 위 층에서 들리는 소리가 심상찮다.
답이 안 나온다.

내가 절망감에 사로잡힐 때, 소녀는 별일 아니라는 투로 시원스레 말했다.

"어쩔 수 없지, 반대편 계단을 사용하는 수밖에."

"무슨 계단?"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대답.

"반대편. 중간 계단은 앞뒤로 포위 당할 수도 있으니까. 아니, 어차피 상관없나?. 분명....."

이윽고 중얼거린 말은 너무 작아 들리지 않았지만, 그보다는 '이런 상황에 너무나 익숙해 보이는' 소녀의 비현실적인 말에 나는 짜증스래 말했다.

"너 바보냐? 저 괴물 천지를 어떻게 지나간다고?!"

검푸른 눈이 나를 찌르듯 본다.

"그래서, 여기에 가만히 있으려고? 다시 올라가려고? 그래 봤자 죽는다는 걸 알면서 그래?"
 
물론 알고말고.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이 현실감각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이성을 유지하라는 거냐!
무섭다고! 겁난다고! 죽기 싫다고! 나는 평범한 학생이란 말이다 젠장 할!

겁에 질려 아무 말도 않은 나에게 소녀는 미소를 띠며 부드럽게 말했다.

"걱정 마 너는 내가 어떤 일이 있어도 지켜줄게.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켜줄게. 반드시. 약속해."

...그건 남자가 해야 할 말이라고.......

나는 이를 꽉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는 한심해지지 말자.
동갑내기 소녀가 이렇게 용기 있는데 내가 겁먹어서야 우습지 않은가.

소녀는 그런 나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맞잡은 손을 당기며 복도로 향했다.

"안 되겠으면 눈을 감아."

그 말에 순순히 눈을 감고 소녀에게 이끌려 걸음을 옮긴다.
질척이는 발밑은 무시하며 복도를 가로지른다.

 

무너진 계단. 꼭 잡은 손. 소년과 소녀, 복도를 건넌다.

그곳은 혼돈이 자리 잡고, 공포가 지배하며, 광기가 날뛰는 곳.

거의 모든 사람들.
도망간다. 도주한다.
쓰러진 사람을 짓밟고, 연인을 밀치고, 친구를 미끼 삼아, 인간은 단지 겁에 질려 달린다.

남은 소수의 사람들.
맞선다. 희생한다.
쓰러진 사람을 일으켜 세우고, 연인은 서로 지키며, 친구와 함께 힘을 합쳐 위기를 넘는다.

하지만, 덧없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 압도적인 재앙에 그들이 보이는 인간다움은, 아름답지만 헛된 몸부림에 불과하다.
비겁한 이들, 용기있는 이들, 너나 할 것 없이 평등하고 공평하게 죽는다. 잡아먹힌다.

절망밖에 없는 상황.
그 와중에도 흔들리지 않은 소녀는, 마법과도 같이 닥쳐오는 모든 위협과 위험을 요령 좋게 피하며 소년을 잡아끌고 앞으로 향한다.

 

"이제 눈 떠도되."

눈을 감고 소녀에게 의지하며 걷고 걷던 중 들려온 목소리에 살며시 눈을 뜨면, 나와 소녀가 반대편 계단에 도착한 것을 깨닫는다.

다행이다. 무사히 왔구나.

긴장이 풀리며 자연스레 한숨이 나왔다. 동시에 의문도 솟았다.

"그런데 어떻게 저 복도를 지났어?"

확실히 뭔가 이상하다. 도대체 어떻게 저 괴물들 사이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지?
단지 18살밖에 안되는 평범한 소년소녀 두 명이?
소녀는 침묵과 함께 시선을 피하며, 이내 굉장히 꺼려하는 기색으로 말했다.

"........요령."

"요령?"

"요령."

"아무리 봐도 요령이라 하기에는...."

이상하지 않나?

말을 끝내기도 전에 더는 묻지 말라는 기색의 공격적인 어조가 귀를 울렸다.

"시끄러워! 살았으면 됐지 뭐!"

"그, 그건 그렇지만..."

고개를 홱 돌리며 강렬하게 쏘아보는 시선에 움츠러들며 겨우 대답했다.
의문은 커지고, 왜 이리 과민반응을 하는 건지도 알 수 없지만, 일단은 입 다물고 있자.

"......"

소녀는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더니 아무 말 없이 걸어갔다. 물론 손은 그대로 쥔 채로.
나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기분으로, 널브러진 사지와 끌려간 듯한 핏자국을 힘들게 무시하며 소녀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이제 남은 계단은 하나─

 

─지만.......

"이쪽으로도 못 내려가겠는데."

우적우적우드득.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는 소리가 가까이서 들려왔다. 소리의 발생지는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한중간.
깜박거리는 형광등 아래를 자세히 보면 통로를 가득체운 듯한 괴물이 등을 우리가 서 있는 쪽으로 돌리고 무언가를 먹는데 심취해 있다.

"또 복도를 가로질러야 하나..."

무심코 손에 힘이 들어갔지만, 공포는 아까보단 덜하다.

내 곁에는 소녀가 있다. 어떤 방법을 사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지옥을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는 소녀가 있다.
소녀가 말했다시피 어차피 살았으니 된 일. 더이상 이것저것 생각하지 말자.

이제는 어딘가 낯선 소녀. 그렇지만 믿겠다는 의미를 담아 바라봤다.
소녀는 그런 나의 눈을 잠시 들여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갈까?"

어깨를 나란히 하고 어두운 복도를 마주 보며 걷는다.
소녀가 있다. 소녀를 믿는다. 소녀가 있으니 안심이다.
....그런데 이 불길함은 뭐지?


──운이 없었다고 할 수 있겠다.


크륵?

계단의 괴물, 미미한 기척을 느끼고 계단의 위로 머리를 돌렸다.

크르륵?

의아함 섞인 울림.
올려다본 계단 위에는 아무것도 없다.
분명히 무언가 있다. 하지만 없다.
단순한 괴물의 머리에 뜬 이상 신호.

계단 위를 본다. 귀를 기울인다. 냄새를 맡는다. 피부로 느낀다.
무언가 있었다.

식욕을 압도하는 호기심.
괴물은 먹고 있던 것을 내버리고 거대한 몸을 움직여 계단 위를 오른다.


하나의 교실을 지났을 때 즈음, 등 뒤에서 걸음 소리가 들렸다. 무겁고 둔중한 것이 땅을 기는듯한 소리.
잘 못 들었나? 라는 생각이 드는 찰나, 소녀가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감각이 좋은 괴물이 있었나...."

"뭐?"

"이제부터 달릴 테니까 손 꽉 잡아."

"무슨 일이야?"

소녀의 긴장이 손을 통해 전해져 왔다. 아까 그 소리 때문에 이렇게 긴장하는 건가?
아니, 그보다 갑자기 왜?

"계단에 있던 괴물이 우리를 쫓아오려고 해. 정신 바짝 차려."

......거짓말할 여유는 없고 농담할 상황도 아니니 사실이겠지.
공포를 느낄 새도 없이 사실은 실질적인 증거로 나타났다.

쿵─!

둔중한 울림. 낮은 으르렁거림. 끈적거리는 살의를 느낀다.
나는 뒤 돌아보지 않았고, 소녀는 외쳤다.

"뛰어!!"

뛴다. 달린다. 고인 핏물을 튀기며, 누군가의 살점을 밟으며 앞만 보고 뛴다.
왜인지 우리를 인식 못 하는 작은 괴물들을 지나쳐, 계속해서 달린다.

─쿵─쿠웅─쿵쿵쿵!!!

땅을 뒤흔들며, 귀청을 울리는, 크고 육중하고 위험한 그것 또한 달려온다.
다른 괴물들과는 달리 확실하게 우리를 인지하며 쫓아왔다.

"─!───!!!!"

고막을 터트릴듯한 괴성은 공포를 닦달하고, 공포는 다리에 채찍질을 가한다.

뛴다. 뛰자!

다리가 무겁다. 숨이 막힌다. 그래도 뛴다. 온 정신을 뛰는 것에 몰아넣으며 달려나간다.
평균보다 떨어지는 허약한 내 몸은 소녀의 짐이 되어 발목을 잡지만 소녀는 잡은 손은 놓지 않았다.

그래서인가, 그런 필사적인 도주도 부질없이 괴물은 순식간에 손 한번 휘두르면 닿을 법한 거리 내로 좁혀왔다.
그리고 인간의 것과 굉장히 흡사한 거대한 팔이 휘둘러짐을 느껴졌다.

죽는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온몸의 감각으로 깨닫는다.
죽음이 가까이 왔노라고.

다가올 고통을 생각하며, 앞선 소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힘을 주어 잡힌 손을 뿌리쳤다.
아까 전과는 달리 땀 때문인지 쉽게 빠져나오는 손.

뒤에 있는 건 나. 그렇다면 먼저 죽는 것도 나. 짐 밖에 안됐던 내가 떨어져 나가면 소녀는 좀 더 쉽게 도망칠 수 있겠지.
그래, 소녀만이라도 살아야지. 괴물이 나를 먹어 치우는 동안 소녀는 충분히 도망갈 수  있을 것이다. 바보 같지만 이게 바로 남자의 마지막
자존심이라는 거다.

라고, 허세를 부려 봤지만, 그냥 체념했다는 거다.

손을 놓은 뒤로 어쩐지 존재감이 희미해져 가는 소녀가, 깜짝 놀라며 돌아보는 게 보였다.
눈이 커다래지며 몸을 돌리려는 소녀. 다시 돌아오려 하는 소녀를 쓴웃음으로 보내고 안녕을 고한다.

벽을 부수며 빠르게 다가오는 괴물의 팔. 그 팔이 느리게 보이는 까닭은 죽을 때라서 그런가 보다라고 생각하며 이를 악문다.

동시에─

난입하는 섬광. 덮쳐오는 불가시의 충격에 앞으로 나뒹굴었다.

넘어지는 와중에 들리는 깨지는 소리. 잘리는 소리. 무수한 단말마.
짧은 시간이 지난 후─ 모든 소음이 멎자 나는 고인 핏물에 피투성이가 된 몸을 일으키며 주춤주춤 뒤를 돌아봤다.

처음 보이는 것은 휘두르는 게 가능하기나 한 것인지 의심이 되는 무식한 검.
시선을 아래로 돌리면 검 날 아래 전신이 토막 난 괴물의 일부.
위로 올리면 검을 쥐고 여유롭게 웃고 있는 '사내'

너무 비현실적이다. 황당하고 어처구니없고 웃음이 나올 정도로 비현실적이다.
아니, 애초에 괴물부터가 비현실. 비현실에 비현실이 더해진 상황인데 칼을 휘두르며 괴물을 잡는 인간 같은 게 나오는 것이 되려
당연하고도 뻔한 순서가 아닌가 싶다.

멍하니 서 있는 내게 사내는 조금 경박하게 말을 걸었다.

"오우오우, 아직 생존자가 있을 줄 몰랐는데?"

어쩐지 사람 짜증 나게 하는 어조다.

"다, 당신은 뭡니까?"
 
"지나가던 사냥꾼이다!"

말을 내뱉고서 어쩐지 기뻐 보이는 기색인 자칭 사냥꾼 사내.
이 말 정말 해보고 싶었어. 라는 중얼거림이 들려왔지만 무시했다.

"사냥꾼?"

"보시다시피 이런 괴물을 사냥하는 사람이지. 그보다 옆은 여자친구?"

손에서 다시금 느껴지는 따뜻함. 슬며시 옆을 바라보면 어느새 돌아온 소녀가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내 손을 단단히 쥐고서
사내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런 소녀의 손길에 안도하며 말을 이어나간다.

"그냥 친구입니다. 그보다, 지금 이 상황에 대해 뭔가 알고 있습니까?"

사냥꾼이라 했다. 괴물을 전문적으로 사냥하는 사냥꾼.
그렇다면 지금 학교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비정상적인 사태와 같은 일이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는 말.
눈앞의 사냥꾼은 이 일에 대해 분명히 무엇이든 알고 있을 것이다.

"흐음, 친구인 건가.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질문에 답해줄 이유도 없고, 의미도 없고 하니, 나는 이만 가보련다."

땅에 박힌 대검을 뽑아 어깨에 걸치는 사냥꾼.
나는 다급히 소리쳤으나 사냥꾼은 무시하며 창문으로 몸을 던졌다.

"잠깐!...."

"아하핫, 더이상 사냥감을 뺏기면 곤란하다고! 그럼 열심히 발버둥치라고 소년!"

연이은 괴물의 비명이 아련히 들려온다.


"괜찮아?"

황망히 서 있는 나에게 굉장히 걱정하는 기색으로 묻는 소녀.
소녀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며 더듬더듬 말했다.

"아....아아, 으응. 괜찮아..."

"그래? 다행이다....."

소녀는 진심으로 안심한 듯, 한숨을 내뱉었다. 이윽고 화냈다.

"그런데 도대체 왜 그랬어?"

"뭐, 뭐가?"

움찔하며 대답하는 나. 소녀는 눈을 치켜뜨며 거칠게 말했다.

"손 놓은 것! 포기한 것! 안 봐도 뻔하지, 혼자 죽으려 했지? 왜 그랬어?!"

그거 때문이었나? 아니, 그럼 그 상황에서 같이 죽었어야 했다는 말이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그게 왜?! 난 당연한 행동을 했다고. 한 사람이라도 살아야지, 안그래?"

"안그래!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고 약속했잖아!"

그런 약속한 적 없다!

"뭐야, 그게? 우리가 무슨 부부냐? 연인이야? 바보야!"

소녀의 얼굴이 빨개졌다.
이런, 제대로 화났나?

"시, 시끄러워! 하여튼 이제 절대로 손 놓치마! 알았지?!"

그야말로 백수의 왕 같은 기세다. 나 같은 건 그냥 잡아먹을 것 같다.
분노에 올라갔던 목소리가 자동으로 수그러들며 나왔다.

"그, 그래 알았어. 알았다고."

소녀는 내 대답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잡아끌었다.

"그럼, 가자!"

붉은 얼굴로 앞장서는 소녀와 한숨을 쉬며 질질 끌려가는 나.
남은 건 한 층. 복잡한 것, 의문이 남는 것, 이것저것 남겨두고 당장 닥친 일에 집중하여 어둔 길을 걷는다.

 

1층. 반대편 계단을 통해 내려온 이곳에는 괴물 같은 건 없었다. 시체도 없고, 있는 건 단지 약간의 파괴된 잔해뿐.
밖이 소란스러운 것을 보면 괴물들이 아직 돌아다니고 있다는 거겠지.

"그런데 이제 어디로 갈 거야?"

자, 1층까지 내려왔다. 당연, 학교를 벗어나기 전에는 안전하지 않고, 도주할 길에는 괴물들이 배회한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어떻게 해야 하나.

"담을 넘자."

"엉?"

"담 넘고 산을 타 넘으면 주택가가 나오잖아? 그러면 운동장을 지날 필요가 없지."

"안개는?"

"걱정 마. 학교 뒷산은 눈 감고도 넘을 수 있어."

아, 그러십니까.
별 달리 방도도 없으니 이제껏 그랬듯 소녀의 말을 따르기만 하면 되겠지.

"자자, 움직이자."

소녀는 기운차게 팔을 휙휙 휘두르며 출입문을 나선다.

그리고 나는, 내 몸은, 건물 안으로 밀쳐졌다.

어라?

절대로 놓지 말라던 소녀의 손을 놓치고 강한 힘에 밀려나 뒤로 넘어지며 출입문을 바라보면, 보이는 건 소녀의 다급하면서도 안도에 찬 표정.
엉덩방아를 찧은 것에 대해 소녀에게 불평을 토로할 새도 없이, 무슨 일인지 물을 새도 없이,
눈앞에서 진행되는 상황에 언어를 자아내는 걸 잊었다.

"──?"

소녀의 등 뒤로 보이는 검은 거체. 타의에 의해 허공을 날아 소녀와 출입문을 짓뭉개고, 부서며, 박살 냈다.

아─

팍─하고 퍼지는 피. 충격에 의해 으스러진 소녀의 육체. 대부분은 괴물의 몸 아래 깔려있고 일부만이 방사형으로 비산하여 흩어져 있다.

아아──

출입문의 부서진 파편이 머리를 스치고 떨어졌다. 화끈한 통증과 함께 머리에서 피가 새어 나왔다.
그러나 그것에 신경 쓸 정신은 남아 있지 않다.
왜냐면,

아─아아아───!!!

소녀는, 소녀가 죽었으니까.
정신이 비명 지른다. 현실을 따라잡지 못한 육체는 사건이 멈춘 듯 굳어 있고 정신만이 빠르게 반응했다.

우두커니 주저앉아 눈앞의 현실을 외면하고 싶은 나에게 소녀의 일부였던 검푸른 눈 하나가 붉게 물들어 데굴데굴 굴러 와 눈빛으로 물었다.
'너는 괜찮니?' 하고.....

"아─아아아아아악!!!!!"


깨닫는 게 늦은 소년의 비명이 어둠과 안갯속에 애처롭고 구슬피 울려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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