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자 이야기 엔딩-그리고 그 뒤에 G의 관측서

Bad End - 마음이 얼어붙은 추격자(Chaser)는 악마를 쫒는다.

끝도 보이지 않는 푸르른 숲 가운데, 우뚝 선 검은 바위산 아래, 아무런 특색 없는 평범한 동굴 앞에, 서 있는 낡은 망토를 걸친 한 명의 인물.
후드를 깊게 눌러써 얼굴이 보이지 않는 망토의 인물은 너저분히 널린 도륙 난 사체와 비릿한 피 냄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꿰뚫어보듯 동굴의 어둠 저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윌 오 위스프(Will o' Wisp)"

한참 동안 망부석처럼 서 있던 망토의 인물에게서 새어 나오는 소리는 친구를 부르는 어조의 짧은 읊조림.
차갑고 무뚝뚝한 목소리에 이끌려 살아 움직이는 빛 덩어리, 이른바 '빛의 정령'이라 칭해지는 존재가 소리 없이 나타나 망토의 인물 주변을 맴돌기 시작하면 그제야
망토의 인물은 불길함이 느껴지는 시꺼먼 동굴을 향해 주저 없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망토의 인물이 어둠 속으로 발을 들어놓기 직전, 때마침 불어온 바람 한 줄기가 답답하게 눌러쓰고 있던 망토의 후드를 벗겨 낸다.

감정 없이 가라앉은 하늘빛 눈동자.
바람에 흩날리는 하늘빛 머리카락.
겨울을 연상시키는 외모의 그녀는 <궁사>.

궁사는 유달리 단호해 보이는 모습으로 최후의 악마이자 마왕의 딸인, 마공주 레이나의 거처를 향해 나아간다.

 

마왕은 강했다. 동료 모두가 있는 힘껏 덤벼들었지만 이기는 것이 가능한가 싶을 정도로.
그 무자비하고도 압도적인 강함에 우리들은 차츰차츰 깍여 나갔었다.
그때 마왕의 갑옷에 난, 칼로 벤듯한 가느다란 균열만 아니었으면 쓰러지는 건 분명 우리들 이었을 것이다. 


갑작스레 튀어나온 자그마한 괴물을 한쪽 팔에 달린 쇠뇌를 쏘아 격살.
나타나자마자 비명 없이 죽어버린 괴물을 짓밟고서 앞으로 이동한다.


그날, 검은성의 결전 끝에 마왕을 쓰러트린 그날.
마왕이 죽고 마공주와 배신자가 사라진 그곳에서 우리는 들었다. '진실'을.
허나 나는 믿지 않는다. 마왕이 말한 '진실'을.
그건 분명 거짓이다. 허구다. 조작이다. 악의 대명사인 마왕의 마지막 조롱이며, 허황된 망상이고, 우리를 흔들기 위한 최후의 저주에 불과하다.
분명 그럴 것이다. 아니, 반드시 그래야 한다.


흐르듯 휘둘러진 가느다란 레이피어에 앞을 막아선 괴물의 팔이 떨어진다. 발목이 잘린다. 목이 갈라진다. 칙칙한 검은 피가 끈적하게 흩뿌려진다.
몸으로 뿌려지는 피는 실프로 간단히 막으며 멈추는 일 없이 전진한다.


하지만 나의 동료들은 마왕의 거짓말을 진실로 받아들였던가.
모두가 망가졌다. 배신자 자식의 친구였던 용사와 현자도, 그를 사랑했던 성녀와 도적도 모두다.
그런 조롱에 놀아나다니 동료였지만 실로 바보 같은 녀석들이다.


꼴에 던전이라고 설치되어 있는 각양각색의 함정들.
윌 오 위스프의 빛 아래 하나하나 해제되고 부서져 나가는 그것들을 뒤로하며 걸어간다.


용사. 마왕에게는 위선자라 불리던 배신자의 절친한 친구.
같은 세계에서 온 세 사람 중 한 명인 그는 모두를, 특히 자기 자신에게 분노하며 미쳐버린체
마왕에게 협조한 인간들과 제어가 풀린 마물들과 마왕의 잔당들을 베고 또 베며 전장을 떠돌고 있다고 한다.


생각보다 깊은 동굴에 짜증이 난다.
하지만 흔들림 없이, 계속에서 들러붙는 마물들을 죽이고 죽이고 죽이며 지나간다.


현자. 배신자와 같은 세계에서 온 또 한 명의 인물. 역시 배신자의 친구였던 그녀는 끝도 보이지 않는 탑에 스스로를 가둔 체 미친 사람 마냥 연구와 실험에 매진하고 있다고 한다.
이미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마법을 개발했지만, 다른 생각은 모조리 배제한 체 현실에서 도망가고 싶다는 일념으로 실험만 반복하고 있다.
현재 연구하고 있는 것은 사자소생과 시간 역행 이라는 소문을 바람결에 들었다.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기계적으로 검을 휘두르고 화살을 쏜다.
조금씩 빛을 살라 먹는 어둠 속으로, 멈추지 않고 들어간다.


성녀. 우리 중 가장 어렸던 소녀. 누구보다 배신자를 잘 따랐으며 마지막까지 배신자를 믿었던 그녀는 신전에 틀어박혀 눈물로 하루를 시작하며 눈물로 하루를 마친다고 한다.
날이 갈수록 쇠약해져 가고 있다는데, 지금쯤이면 죽었을까 싶다.


이제는 마물도 함정도 더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저 멀리서 철문 하나가 푸른 불꽃 아래 모습을 드러낸다.
어느새인가 사라진 빛의 정령. 허나, 망설임 없이 전진한다.


도적. 언제나 쾌활했고, 배신자를 사랑했던 수인족 여자. 배신자의 배신에 가장 크게 상처받았던 멍청한 여자는 마왕의 '진실'에 다시 한 번 상처 입고,
결전의 날 이후로 사라졌다. 흔적조차 없이 누구에게 말 한마디도 없이 떠나갔다.
참으로 미련한 여자가 아닐 수 없다.

 


"여기가 마지막인가...."

길고 길었던 동굴의 끝. 더 이상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단단히 틀어박힌 철문을 앞에 두고 궁사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분명, 이 앞에는 그가 있다.

이리저리 구멍 뚫리고 찢어진 망토를 벗어 던지며 가볍게 숨을 고른다.
알지 못하지만, 느낄 수 있다. 이는 어떤 무언가로도 설명할 수 없는 확신. 
이제, 마지막이다.

궁사는 어째서인지 제멋대로 두근거리는 심장을 다독이며 가로막는 철문을 베고 안으로 들어간다.

"윽...."

직후, 시야 가득 쏟아져 내리는 눈 부신 빛에 일순 눈살을 찌푸리며 혹시나 있을 적습을 대비했다.
이내 시력이 돌아오면 보이는 건, 널찍한 공동안의 알 수 없는 복잡한 실험 기기들과 부글부글 끓고 있는 정체불명의 약물들, 그리고 정중앙의─

".....배....신자.."

보랏빛 수상한 액체로 가득 찬 유리관과 그 안에 든 하나의 인영.
순간적으로 크게 뛰는 가슴에 무심결에 중얼거리는 그 이름.
 
배신자.

그녀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배신자의 피투성이의 몸은, 비록 온갖 흉터를 안고 있지만 떨어져 나갔던 팔마저 온전히 붙은 체 회복되어
보랏빛의 액체 속에 가만히 뜬 체 평온히 눈을 감고 있었다.

멍하니 바라보는 건 그저 순간, 정신을 차리고 이를 악문체 레이피어를 뽑아든다.

살아있다? 살아있다고? 그게 뭐 어떤가. 배신자는 어디까지나 배신자. 아버지 같던 스승을 죽이고, 동료를 죽였던 후안무치한 인간. 아니, 쓰레기.
그때 죽지 못했다면,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죽여 주겠다. 반드시 죽일것이다.

"나는 안 믿어. 그딴 거짓말 같은 건 안 믿어. 죽일 거야. 죽인다. 죽여버린다. 죽여....."

흔들리는 마음에 겁먹어,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 살해의지를 주문처럼 되 내였다.
천천히 내딛는 걸음. 마침내 유리관 앞에서, 손에 힘을 줘, 있는 힘껏 레이피어를 휘두른다.

"죽어엇!!!!"
"멈춰─"

하지만 머리를 노리고 달려드는 검은 빛줄기에 반사적으로 궤도를 수정, 날아오는 빛줄기를 베어내며 유리관에서 거리를 벌린다.
이윽고 배신자의 앞, 활짝 피는 어둠과 함께 등장하는 한 여인. 많은 이들이 그녀를 부르기를, 마왕의 딸. 최후의 악마. 악마들의 공주.
마공주─[레이나].

"하, 뻔뻔스럽게도 살아있었군, 레이나! 혼자 살아남은 게 수치스럽지도 않나?!"
"전혀. 살아야 할 이유가 있었으니까."

고요히, 그리고 명확히 답하는 레이나의 무감정한 목소리에 궁사는 순간적으로 이해하고 만다.
허나 궁사는 자신의 마음을 무시하며 악에 받친 듯 소리쳤다.

"살아야 할 이유? 핫, 복수? 아니면 다시 마왕군이라도 일으킬 속셈인가?"
"아니, 그야."

단언. 고개를 저은 레이나는 배신자가 들어있는 유리관을 쓰다듬으며 애달픈 얼굴로 말했다.

"그가, 아직 살아있으니까 나는 살아야 해."

궁사는 생각했다.

불쾌하다.

"그의 치료는 이제 다됐어.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깨어날 거야."

궁사는 생각했다.

정말 불쾌하다.

"그의 동료였던 널 죽일 생각은 없어. 그러니 방해 말고 돌아가."

궁사는 생각했다.

매우 불쾌하다.

"애초에 너희들은 그의 앞에 나타날 자격도 없잖아? 그렇게나 매도하고 상처 입혔으면서."
"닥쳐닥쳐닥쳐......닥쳐!!!!!"  

노성과 함께 쏟아지는 화살 다발이 레이나를 향해 쏘아지지만 가볍게 막혔다.

"나타날 자격이 없다고? 웃기는 집어쳐! 이 자식은 배신자다! 스승을 죽이고, 동료를 죽이고, 친구마저 죽이려 들었던 배신자란 말이다!
 나는 마왕의 거짓말 따위 믿지않아. 아직 살아있다고? 그러면 다시 죽여버리겠어!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도록 갈기갈기 찢어버리겠어!"

분노한 궁사의 의지에 이끌려 자연스럽게 4원소의 정령이 나타난다.
푸르른 활은 살아있는 듯 스스로 공중에 떠올라 화살을 재고, 레이피어에는 녹빛의 날이 덧씌워지며 다른 한 손에는 검붉은 마력이 흉흉하게 아우성친다.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네년은 어째서 나를 그렇게 동정하는 눈으로 보는 거지? 죽여버리겠어!!!


격돌하는 두 사람. 형형색색의 빛 무리와 어둠이 길항하는 가운데, 유리관 안의 사내의 손가락이 꿈틀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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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엔딩이 두어개 정도 남았습니다...


[The Fools~ 광대 이야기]웃지 못하는 광대 G의 관측서


 옛날, 넓디넓은 하늘 아래 그 어딘가에, 웃지 못하는 광대가 있었다고 한다.

 그 광대는 거짓 웃음을 뒤집어쓰고 세상천지 그 누구보다 흥겨운,
한 편으로는 그 무엇보다 구슬픈 노래와 춤으로 세상을 떠돌았다고 전해진다.

 The Fools~ 광대이야기. 그 첫 번째. 웃지 못하는 광대.
자, 저기 저 어느 한 나그네가 들려주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녀를 만난 것은 수많은 우연 중 하나였다-

 흐음....... 너무 진부한 표현인감? 뭐 어때, 그냥 넘어가자고 형씨.

 잉? 네가 뭔데 형씨라고 부르냐고?
 
 아따, 그 양반 별것 가지고 다 시비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바람 따라, 구름 따라 하염없이 세상을 떠돌며,
온갖 신기한 이야기를 모으는 객(客)이올시다.

 뭐? 그건 겉으로 봐도 알겠다고? 야 이놈아, 그럼 왜 물어봤어?!!!

 흠흠, 하여튼간에 이야기를 계속하지.

 앞에서 말했다시피 그, 후에 웃지 못하는 광대라고 불렸던 그 양반이 그녀, 얼음공주님을 만난 것은 정말
우연이었어. 그가 아주 우연히, 나들이를 나선 공주님을 보고 첫눈에 반한 것이지.
 
 그러니까 무슨일이 있었느냐 하면.......

 


 그녀를 만난 것은 수많은 우연 중 하나였다.

 더불어 다시없을 행운이었다, 고 생각한다.

 그녀, '하얀 왕국의 웃지 않는 얼음공주님'에 대한 소문은 숱하게 들어봤다.

 뭐냐, 8살 생일 때 '서쪽의 검은 마녀' 에게 웃음을 뺏겨버리고 점차 다른 감정들도 말라버려 지금에 와서는
아무 감정 없는 얼음 꽃이 되어 버렸다던가, 뭐라던가.

 그때는 난리도 아니었어, 웃음을 잃어버린 공주를 본 팔출불 왕씨는 눈이 뒤집혀서 서쪽의 검은 마녀를
잡기 위해 직접 나섰다가 된통 깨져버리고 목숨만 겨우 부지해 돌아왔었지.

 그 뒤에는 당연한 수순으로, 왕은 공주의 웃음을 되찾는 데에 삼 대가 놀고 먹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상금을
걸었고, 그 상금에 눈이 먼 수많은 사람들은 서쪽의 검은 마녀를 잡으러 가거나 공주를 웃겨보기 위해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 수도로 몰려가 온갖 재주를 다 부렸지 뭐.

 뭐어, 10년이 지난 지금도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지만 말이야.

 나? 나는 도전안했냐고?
 
 했을리가 있나, 그때의 내 나이가 몇 갠데.

 그때는 한창 먹고, 자고, 뛰노는 것에만 열중했던지라 나라에 떠도는 소문에 신경쓸틈 없었다고.

 여하튼 내가 그 소문이 무성한 얼음공주님을 만난 것은,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얼음공주님을 본 것은
하얀 왕국의 수도, 그곳의 시장통이었어. 이리저리 떠돌며 홀로 공연을 했었던 나는 그곳에서도 공연을
해볼까 해서 적당한 무대를 찾아보고 다녔지.

 거참, 한 나라의 수도라면서 뭐 그리 자리가 없는 건지, 웬만한 장소는 이미 선객이 전부 다 차지 하고 있어
뭐 빠지게 고생은 고생대로 다하고, 자리는 자리대로 못 찾고 원.

 그렇게 공연하기 좋은 장소를 찾기 위해 터덜터덜 걸으며 얼마나 돌아다녔던가, 그때! 나는 본 거야!
좌우로 갈라선 인파 사이를 은빛 찬란한 갑옷을 입은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새하얀 드레스로 몸을 감싸고,
얼음공주라는 이명에 걸맞게 무표정하고 도도히, 성을 향해 걸어가는 그녀를!

 아아, 그때의 감동을 무어라 표현하면 좋을까. 마치 따스한 빛줄기가 온몸을 휘감는 것 같았다─ 라고
한다면 개그가 되려나?

 우연히, 짧은 순간, 아주 잠시 공주의 얼굴을 훔쳐본것에 불구했지만, 나는 그녀에게 첫눈에 반해버렸어.
홀딱 빠져버렸다고.

 어엉? 그런데 무엇이 행운이었냐고? 얌마, 세상에 다시없을 미인을 바로 앞에서 보고, 비록 이루어지지 않을
부질없는 꿈이겠지만 가슴 속으로 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꿈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행운이 아니고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자, 그 뒤로 내가 무엇을 했을까? 무엇을 했을 것 같아? 당연한 것 아냐?! 공주님을 따라 곧바로 성으로
달려갔지.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거지.

 

 "그래, 도전하고 싶다고?"

 힘없는, 이제는 기대조차 안 한다는 기색이 물씬 풍기는 왕의 목소리.

 하긴, 무려 십 년이다. 사랑하는 딸내미가 감정을 잃어버린 지 벌써 십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웃게 할수 있다고 찾아오는 이들은 단 한 명도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했고, 마녀를 잡으려고 떠난 이들은
지금까지 소식이 없다. 그런 상황에서 왕은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단지 일말의 희망을 포기하지 못한 체 매달릴 뿐이지. 

 "예, 그렇습니다. 왕이시여. 이 비천한 광대가 감히 공주님을 웃겨 보렵니다."

 광대는 크고 과장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하지만, 고개를 너무 숙인 탓에 앞으로 기우뚱, 바닥에
얼굴을 정면으로 부딪치고 만다. 아픈지 얼굴을 감싸며 펄쩍펄쩍 뛰는 광대. 이번엔 무언가 미끄러운 것을 밟고
뒤로 넘어갔다. 뒤통수를 부딪친다. 쾅─ 앞뒤를 부여잡고 데굴데굴데굴.

 하지만, 대전 안 의 반응은 시원찮다. 지겹다는, 지루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왕과 그의 신하들.

 웃음 소리가 없자 벌떡 일어나 시무룩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광대. 축 처진 어깨가 안쓰럽다.

 피식, 그런 광대를 보며 왕은 왠지 자존심 상하게 하는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만, 일단 웃기는 재주는 있는듯 하군. 괜히 테스트 한다고 시간뺐길 일은 없겠어. 한 달을 주지,
잘 해보라고 249,321번째 도전자."

 그 목소리에 광대는 언제 시무룩하게 쳐져 있었느냐는 듯, 활짝 웃으며 엉덩이를 뒤로 쭈욱 빼며 고개를
숙였다. 찌지직─ 이번엔 바지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쑥스러운지 고개만 들어 머쓱히 머리를 긁는 광대.
이어진 왕의 축객령에 그 자세 그대로 대전을 빠져나갔다.  

 

 땅에 닿을 정도로 숙였던 허리를 곧게 펴고 앞장선 시녀를 따라 걷는다.

 "흐으응~ 이제는 지겹다─ 인가~?"

 무표정하던 왕과 신하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하긴, 10년 동안 2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의 개그를 봤다면 잘 웃던 사람도 안 웃게 되겠지.

 그러니까, 비록 그 누구도 웃기지 못했지만, 나는 기죽지 않아.

 내가 누구냐?! 나를 누구라고 보는 거냐?!!

 나는 하늘님을 조롱하고 아랫님을 웃겨 드리며 세상인심 먹고사는 광대이올시다!!!

 이까짓 일로 기죽을 소냐!

 "뭐, 그래도 다음에는 비장의 108개그를 선보여줄까~?"

 하지만, 이렇게 미련을 약간.

 자아, 자아, 자아, 그건 그렇다 치고 이제 공주님을 만나러 가보실까나?

 짤막한 공연의 와중에 찢어졌던 바지는 간단히 수복 완료. 어떻게 고쳤는지는 기업비밀이다.

 공주님을 뵈러 가는 데 찢어진 바지를 입고 갈 수야 없지.
 
 과거는 떨쳐내고 발걸음은 가볍게, 가볍게, 경쾌하게!!

 

 희게 빛나는 은발. 고요히 가라앉은 청안. 고결해 보이는 순백의 드레스로 몸을 감싸고,
얼음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 무표정으로 만인을 내려다본다.

 저분이 바로 '하얀 왕국의 웃지 않는 얼음공주님' 그 자체!

 울컥, 하고 치밀어 오는 감동에 몸을 떨며 인사한다.

 아, 잠깐 눈물 좀 닦고.

 "안녕하십니까, 공주님. 이 비천한 광대가 감히 공주님의 웃음을 되찾아 드리기 위해 대령 했사옵니다."

 광대는 똑같은 내용의 공연을 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광대 퀄리티!!

 고개를 숙임과 동시에 툭, 하고 떨어지는 광대의 모자. 광대는 당황하며 모자를 주우려 하지만,
모자는 마치 살아있는 양, 광대의 손을 피해 이리저리 도망간다.
광대의 모자는 이리 뒹굴, 저리 뒹굴, 뒹굴뒹굴뒹구르르~.
광대는 모자 따라 저리 데굴, 이리 데굴, 데굴데굴데구르르~.
가까스로 모자를 잡아 쓰는 데 성공한 광대. 하지만, 모자는 화가 났는지 광대의 머리카락을 잡아 뜯는다.
아이구, 아프다 아퍼. 

 "......."

 하지만, 공주님이 이 정도 가지고 웃을 리가?

 아무 말없이, 처음 그대로의 표정으로 묵묵히 바라보는 공주님의 시선에는 아무런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다.

 즐거움도, 지루함도, 그 무엇도......

 훗, 이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어. 이 정도로 함락되서야 내가 곤란하지!

 시간은 많다. 현재로서 유일한 도전자인 나에게는 무려 한 달이라는 시간이 주어져 있다.

 내 혼을 불태워서라도 웃기고 말리!

 풀죽은 표정으로 엄지손가락을 쪽쪽 빨며 주위를 둘러보던 광대는 다시 한 번 활짝 웃으며 전의를 불태운다.
새 하얗게 타버릴 기세로 자신의 기예를 펼쳐낸다. 혼을 다한 온갖 휘영 찬란한 묘기들.

 그렇게, 시간은 흐른다.


 

 에구구, 여기서 잠깐 쉬자고. 늙으니 이야기 하나 하는 것도 힘들구먼.

 어엉? 뭐가 힘드냐고? 엄살 아니냐고? 네놈이 한 번 늙어봐라 이눔아!!!  

 에잉, 요새 젊은것들이란......

 하여튼간에 이렇게 광대와 공주님이 만났지.

 말 그대로 우연이었지? 이렇게 우연히 찾아왔을 때 필연으로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그러니 투덜거리지 말고 잘 적어둬, 인마.

 자아, 이렇게 광대는 무려 한 달이라는 시간을 얻고서 매일매일 공주님을 뵐 수 있었어.

 뭐, 공주님을 보는 것 은 매일 일정 시간마다 공주님 앞에서 묘기를 부렸을 때 뿐이지만 말이야.

 시간이 흐르고, 순식간에 한 달이 지나 광대의 밑천까지 다 들어냈을 때, 광대는 얼음공주님 다음으로
웃기는게 힘들다는, 10년이란 세월동안 웃는 것에 질려버린 왕과 그의 신하들, 하인 하녀들, 무뚝뚝하기로
유명한 기사들마저 웃게 하는데 성공했어!!!

 대단하지? 정말 대단한 양반이지? 하지만, 그 양반이라도 한 명의 웃음을 되찾아 주는 데는 실패했다더라.

 그래, 단 한 명. 공주님의 웃음을 되찾아 주는 데는 실패했다고.

 웃음을 되찾은 왕은 광대에게 왕실광대로 남아줄 것을 부탁했지만, 광대는 공주를 웃기지 못했다는 절망과
자괴감에 왕의 부탁을 거절하고 성을 뛰쳐 나왔어.

 절망하며 성을 나온 광대. 광대의 실패로 이야기는 끝날것 같지만, 이 이야기는 아직 끝이 아니야.

 그 뒤로─ 무슨 일이 있었을까???

 궁금하지? 궁금하겠지? 지금부터 이야기 해줄게. 귓구멍 파고 잘 들어.
 

 

 절망했다! 공주님을 웃기지 못한 나에게 실망했다!!!

 후우, '비장의 108개그'에 이어 '절대 금기 4종 세트'마저 실패하다니!!!

 내가 너무 쉽게 생각 했던 것 일까? 그런 것 일까?

 분명히 나라면 웃길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웃길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결과는 대실패!

 성안, 다른 사람의 웃음을 되찾아 준 것만 해도 실패는 아니겠지만, 주위의 갤러리만 웃기면 뭐하냐.
단 한사람. 사랑하는 공주님을 못 웃겼는데.....
 
 나오는 건 한숨이고, 들어오는 건 좌절뿐이랴.

 더 이상의 방법은 없을까?........

 터덜터덜, 휘적휘적, 광대가 힘없이 걸어간다. 축 처진 어깨가 안쓰럽도다.

 울상짓는 얼굴은 불쌍하게 보여야 하련만, 오히려 우스꽝스럽게 보인다.

 터덜터덜터덜.

 그러나 어느순간, 힘없이 걸어가던 광대가 걸음에 힘을 준다. 가슴을 활짝 폈다. 얼굴에 미소를 담았다.

 그리고, 광대는 다짐했다.

 포기하지 않아. 나는 포기하지 않아. 나는야 광대.

 남을 웃기는 것이 나의 본분.
 
 높으신 분을 조롱하는 것은 나의 특기.

 그러니, 단 한 사람도 울상 짖지 못하게 만들 꺼야.

 웃어라, 내가 대신 울어줄 거니.

 참아라, 내가 대신 조롱해주마.

 히죽히죽, 무언가를 떠올린 광대는 그 보무도 당당히, 걸음을 옮긴다.

 목적지는 서쪽! 검은 마녀가 살고 있는곳!

 공주님의 웃음을 되찾기 위해, 공주님을 웃게 하기 위해 내가 지금 간다!

 광대가 떠난 자리 웃음소리만 남도다.

 

 정면에 자리한 숲을 바라봤다.

 서쪽 끝. 1년 365일, 낮이고 밤이고 사시사철 짙은 안개로 뒤덮힌 곳. 그리고 공주님의 웃음을 빼앗아간
'서쪽의 검은 마녀'가 사는 곳.  

 불로만 이루어진 강을 건너, 저 아래 지옥이라도 있을법한 심연의 구덩이를 지나, 온갖 위험 넘어서서,
나, 여기 왔노라! 보았노라! 그리고 이제 찾으리라!!!

 후으, 이곳까지 오는데 정말 고생했지. 아마 여기까지 온 건 내가 최초일걸?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실패한 이곳을 한 낱 광대가 어떻게 왔는지 묻지 마라, 광대의 트릭은 눈감아 주는 게
예의다.
 
 뭐, 덕분에 몸은 거덜거덜~ 마음은 너덜너덜~ 심신이 걸레 짝~☆

 크흠, 헛소리는 이제 그만. 어서 마녀를 만나러 가봐야지.

 상처입은 몸을 이끌고 휘적휘적 숲으로 걸어 들어간다. 안개를 가르며 나아간다.

 그러다 문득 드는 의문. '그런데 어떻게 마녀를 만난다지?'

 잠시 잊었던 사실에 광대는 걸음을 멈추고 끄응하는 작은 신음성을 내뱄는다.

 머리를 굴리고 굴리고 이리저리 굴려보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다시 그 위에 고민을 더해보지만 답이 나올 리가?

 이럴 땐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일념으로 앞으로 달려나가면 되는 일.

 응응, 그러니 일단은 전진이다!!

 끼긱끼긱, 상처투성이인 다리를 움직여 다시 한번 앞으로!! 앞으로!!!

 경쾌하게 춤을 추듯 안개속을 헤엄쳐 걸어가는 광대. 그 움직임, 실로 유쾌하도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헤에~? 이곳까지 온 인간이 다 있내??"

 안개 저 너머, 어딘가에서 듣기 좋은 미성이 들려온다. 그와 동시에 안개가 걷히고 나타난 마녀..... 마녀??

 숲, 나무와 나무 사이, 그 가운데 마련된 공터. 안개 한점 없이 깨끗한 그곳에 웬 글래머 아가씨가 방글방글
웃으며 서 있다.

 온통 칠흑색. 심연의 어둠을 연상시키는 흑안. 검디검은 긴 생머리에 챙 넓고 끝이 뾰족한 검은 모자,
굽 높은 검은 구두와 수수한 검은 원피스. 그나마 다른 색을 찾자면 한겨울의 눈을 연상케 하는 새하얀 피부뿐.

 뭐냐, 루즈도 검정이냐? 거참, 검정색 좋아하는 아가씨구먼. 이라는 생각도 잠시, 퍼뜩 든 생각에
그 아가씨를 향해 질문했다.

 "예에.....그러니까...... 마녀..... 이십니까?"

 "네가 말하는 마녀가 '서쪽의 검은 마녀'를 말한다면 Yes─ 라고 답하지."

 "........"

 허허... 거참, 마녀는 모두 늙고 추악하게 생겼다─ 라는 상식을 깨는 마녀구먼.

 환히 웃는 얼굴로 수긍하는 마녀를, 여기까지 온 목적마저 잊고 뻥 진 얼굴로 바라본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마녀의 외모에 넋이 나갔다고 하는 게 옳겠지.

 멍하니 마녀의 얼굴을 바라보기를 수 초, 이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차─, 이럴 때가 아니지!

 애당초 여기까지 온 이유가 뭐냐! 공주님의 웃음을 되찾아 주기 위해서가 아니던가?!!!

 그러니 당당히 소리쳐라!! 나의 목적을!!!

 "마녀님! 저랑 사귀어 주십시오!!!"

 "싫어."

 즉답이냐! 아니 그전에, 나는 뭐라고 소리친거냐앗!!!

 광대는 헛소리를 내뱉은 자신의 입을 한 대 쥐어박아 준 후, 다시 한 번 소리쳤다.

 이번에야말로!!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마녀님!! 공주님의 웃음을 되돌려 주십시오!"

 "그래? 그럼, 네 웃음을 내놔."

 "드, 드리겠습니다!!"

 "필요 없어."

 "?!!"

 잠까안!! 이건 무슨 만담이냐!?!!

 분위기에 휩쓸린 거냐? 그런 거냐??!

 이놈의 입! 이놈이 하라는 말은 안 하고!!

 짐짓 화난 듯, 아니, 진짜로 화난 듯 자신의 입을 퍽퍽 치는 광대.

 마녀는 그런 광대가 재밌다는 듯 쿡쿡 웃고는 정색하며 말했다.

 "뭐, 농담이고. 너의 웃음을 내놔, 그러면 공주의 웃음을 되돌려 주지."

 그에 광대도 자신의 입을 때리던 것을 중지하고, 얼굴을 딱딱히 굳히며 생각했다.

 웃음을 내놔─라..... 방금전에는 분위기에 휩쓸려 반사적으로 준다고는 말했지만,
이것은 심각하게 생각할 문제다.

 자고로, 남을 웃기려면 자신이 먼저 웃을 줄 알아야 하는 법이다.

 그런데 남을 웃겨야 하는 광대가 웃을 법을 모른다면 어찌하는가?!

 이것은 광대 생활 때려치우라는 소리인가??!!!

 뭐, 그렇지만........

 "까짓 거, 드리지요."

 씨익─ 웃으며 말하는 광대. 그러자 마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의외다'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헤에~ 저기, 그렇게까지 해서 공주의 웃음을 되찾을 필요가 있어? 어차피 공주는 네가 이런 고생을 한 것도
모를 텐데?"
 
 "뭐, 그렇겠죠. 높으신 분이 천한 것들의 고생을 알 리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단지 제가 그러고 싶기 때문에,
공주님을 사랑해 버린 것 때문이지요."

 "사랑에 이 한 몸 불태운다─인가? 대단한 로맨티스트군."

 비아냥거리는 기색 없이, 순수히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마녀는 말을 이었다.

 "좋아, 그렇다면 소원대로 너의 웃음과 공주의 웃음을 바꿔주지. 나중에 후회하지 말라고."

 그리고 마녀는 팔을 광대 쪽으로 쭉 뻗으며 덧붙였다.

 "그럼, 언젠가 또 보자고. 광대─."

 말이 끝남과 동시에 터지는 강렬한 섬광. 사방팔방으로 날뛰는 광풍. 바람 찢기는 소리 사이로 마녀의
깔깔거리는 웃음이 들려왔다.
 
 상처입은 몸은 바람결에 휘청휘청~ 눈을 가리며 휘몰아치는 바람에 밀려나지 않도록 몸을 지탱했다.

 잠시 후, 빛은 소리없이 가라앉고, 바람이 떠나간 자리에 마녀는 온데간데없다. 그 대신 활짝 웃는, 언뜻 보면
슬피 웃는 가면이 하나.

 얼떨떨한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던 광대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서 이제 자신은 웃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후회는 안 한다. 이것으로 공주님이 웃음을 되찾게 됐으니 다행이지 않은가?

 그렇지만........

 고개를 잠시 가로젓던 광대는, 땅에 떨어진 가면을 주워 더는 웃을 수 없는 얼굴 위에 거짓 웃음을 덧씌운 후
발길을 돌려 지금까지 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언제나처럼 가볍게, 가볍게, 경쾌하게.

 하지만, 그 발걸음에는 더이상 기쁨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 후, 광대는 곧바로 하얀 왕국의 수도로 돌아갔지.

 다시는 다가가지 못할 공주님의 웃음을 먼발치에서라도 보려고 말이야.

 온갖 상처를 입은 너덜너덜한 몸으로 마침내 하얀 왕국의 수도에 도착한 광대가 무엇을 봤는지 알아?

 바로 수많은 백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에서 진행되는 공주와 이웃나라 왕자님의 결혼식, 광대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시킬 정도로 사랑하던 공주님이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것을 봤다 이거지.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번 셈이지 뭐.

 아주 젠장 할 일이야. 젠장 할 일이고 말고......

 쯧, 하여튼 광대 그 사람도 자신이 보상받지 못할 것이라고, 괜찮다고 스스로 각오는 했지만,
충격이 컸었나 봐.

 혼이 빠진 듯, 망연히 서서 공주님과 이웃나라 왕자님의 결혼식을 지켜보던 광대.

 그는 실로 기쁜 듯, 환히 웃는 공주님을 보며 무엇을 생각했을까?

 뭐, 내가 알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렇게 가만히 공주님의 결혼식을, 공주님의 환한 웃음을 지켜보던 광대는, 불현듯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기
시작했어.
 
 보는 사람 모두를 즐겁게 하는, 한편으로는 슬프게 하는 그런 춤과 노래를......

 그리고 그는 그대로 떠나갔대. 어디일지 모를 곳으로.

 자, 이것으로 웃지 못하는 광대의 이야기는 끝이야.

 재밌었지? 그렇게 재미있었다는 얼굴로 거짓말은 하지 말라고.

 아하핫, 알았어, 알았다고. 진정해.

 으응? 그런데 광대는 그 후에 어떻게 됬냐고?

 글쎄, 웃지 못하는 광대라 불리며 이리저리 떠돌았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나도 정확히는 몰라.

 뭐, 어딘가에서 또 남을 웃기고 있을지 모르지.

 .........

 후우, 쉴 만큼 쉬었겠다. 이야기도 끝났겠다. 이제 떠날시간이군.    

 그럼 다음에 보자고.


어느날 학교에서 소녀가 물었다 G의 관측서


너는 판타지를 좋아하는가?

괴물이 나오고, 검을 휘두르며, 마법이 튀어 나른다.
그곳에는 꿈이 있고, 희망이 있고, 로망과 낭만도 존재한다.
모두가 동경하는 세계. 한 번쯤 가보고 싶은 곳. 그러나 갈 수 없는 장소.

허나, 기뻐해라. 바라지 마지못한 그것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

단지, 꿈이고 희망이고 나발이고 없다는 것이 문제지만......

 

'그것'들은 울부짖었다.
도무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괴성. 위압과 공포를 담아 단지 내 어지르는 외침.

떨린다. 그 고함에 공기가 떨리고, 유리가 떨리고, 온몸이 떨린다.

괴물, 괴수, 요괴, 몬스터─

글로서, 그림으로서, 영상으로서 인간의 적으로, 때로는 인간의 친구로 표현되고 묘사되는 것들.
어째서인지 그런 환상에서 뛰쳐나온 괴물들이 운동장에 넘쳐 흐른다.

"....꿈인가?"

물론, 빌어먹지만 현실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이거."

당연, 뭣도 아닌 내가 이유를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알 수 있는 건, 아는 건, 매우 단편적인 사건들.

어느 순간 검게 물든 하늘.
학교 담장 너머로 뿌옇게 끼기 시작한 안개.
일그러지고 비틀리는 허공.
상황을 인지한 교내의 떠들썩함.

단지 이 정도. 점심시간에 언제나처럼 훔친 열쇠로 옥상에 오른 내가 볼 수 있었고, 알 수 있었던 건 여기까지.
도무지 따라잡지 못할 상황. 그에 압도되어 혼란스러운 머리로 멍하니 운동장을 내려다보는 그즈음.
온갖 이형의 괴물들,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이렇게 중얼거린 건, 괴물들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한참이나 지나고서.
교내의 웅성거림이 고통과 공포로 뒤범벅된 절규로 바뀌는 것을 들으며.
운동장에서 배회하는 저 녀석들이 절대로 우호적인 놈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후.

나는 생각한다.

현 상황을 바라보고 두려워하고 떨면서, 그래도 냉정해지도록 노력하며,

나는 생각한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뻔하지, 도망쳐야 한다. 이건 생존을 위한 당연한 본능. 이렇게 계속 서 있기만 하다가는 언제 피투성이로 쓰러질지 모른다.
그러니까, 도망이다. 이 장소에서 벗어나 어디로든 안전하다고 판단되는 곳에 숨자.
저 괴물에게 맞선다는 발상은 만용이고 죽지 못해 발악하는 몸부림.
그러니 마음을 다잡고 용기를 내자.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그렇게 각오를 다잡으며 한 발짝, 다리를 옮겼다.

그 순간,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호쾌하게 열리는 육중한 철제문.

벌써 여기까지 온 건가?

머릿속에 스치는 생각에 순간 굳어버린 몸으로 옥상 입구를 바라보면 문턱을 넘어 나타난 건, 크고 검푸른 눈이 인상적인 '이웃집 소녀'.
소녀는 등장과 동시에 나를 보며 외쳤다.

"가자!"

그러고선 검은 단발을 사자 갈기처럼 휘날리며 다가와 다짜고짜 손을 잡아끌었다.
어라라? 하며 반응도, 반항도 하지 못하고 마냥 끌려가는 나 자신.
겨우 정신을 차리고 다리를 멈추면 소녀는 그 큰 눈망울을 깜박이며 뭐하냐는 듯, 나를 바라봤다.
너야말로 뭐 하는 거냐! 라고, 소리치고 싶은 심정은 꾹꾹 누르고 소녀를 뿌리치려고 잡힌 손을 턴다........안 풀린다. 재도전. 그래도 안된다.

몇 번이고 뿌리치려 하지만, 꽉 잡힌 손은 도무지 풀리지 않았다.
아무리 내가 체력이 약하다고는 하다만 동갑내기 여자애의 손도 뿌리치지 못하다니.
어쩐지 남자로서 비참한 심정에 얼굴이 구겨진다.

결국, 손을 빼내는 건 포기하고 더욱더 미묘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소녀에게 발끈하며, 마음속에 담아 둔 말을 소리쳤다.

"갑자기 나타나서 뭐하는 거냐! 이 바보 여자!!!"

"뭐하는 거긴. 죽기 싫다면 도망가야지?"

눈을 반짝이며 당연한 상식을 답하는 소녀. 그건 분명히 내가 방금 생각하던 거고, 이제 막 실행하려던 거다.
그러니 이대로 따라가도 상관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그게 그렇지 않은가, 막상 무언가를 하려고 할 때 누군가 하라고 시키면 하기 싫어지는 거.
그래서, 나는 투정부리는 어린애 마냥 저항해본다.

"어디로, 사방이 괴물 천지인데? 뭔가 뾰족한 수라도 있는 거야?"

"없지. 그렇다고 멍하니 서 있다가 죽는 것 보단 낳잖니?"

당연하디당연한 답변이고 그게 진실이다. 반론할 수 없다만, 아직 궁금한 것은 남아 있다.

"그럼 혼자 가면 될 것이지 왜 여기까지 온 거야?"

근성이 이기적인 게 인간 아니던가?

"......아주머니가 너 꼭 좀 데려오래. 딴 길로 새지 못하게 감시하고......."

아주머니는 우리 엄마를 말하는 거겠지. 그보다 그 말은 이 상황이랑 상관없지 않나?─라는, 표정을 지어봤다.

"에이잇! 시끄럽고, 어서 따라왓!"

어째서인지 얼굴을 붉히며 강제적으로 내 팔을 잡아끄는 소녀. 납득 안 간다는 표정으로 끌려가는 나.
뭐가 뭔지.

 

어쨌건 저 쨌건 이제 이건 넘어가자.

 

소녀의 손에 이끌려 어두컴컴한 교내로 들어서 희미하게 보이는 계단을 한 걸음 조심스레 내려가다 보면, 제 기능을 못하는 눈을 대신하여
밝아진 귀가 지옥에서 들려올 법한 아우성을 끊임없이 잡아냈다.

그 마음속 공포를 자극하는 소리에 애써 강한 척을 해보지만, 가슴 한구석이 좀먹어 감을 느낀다─마음이 깎여간다.

그런 내 심정을 알아차린 건지, 아니면 자신도 불안했던지 따뜻하게, 그러나 아프지 않게 꼬옥, 쥐어지는 감각.
소녀의 손에서 느껴지는 따뜻함에 마음이 안정됨을 깨달았다.

다시 한 번 남자로서 한심하다고 생각됐지만, 일단 무시하자.

"그런데 바보 여자."

"왜, 멍청한 남자."

지금까지 보고, 현재 진행형으로 듣고 있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상상이 가고 짐작이 가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래서 묻는다.
부질없지만 현실이 아니길 빌며.

"....저 아래는... 어떻게 됐어?....."
 
"......."

질문에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소녀는 계단의 끝에 내려서며 딱딱하게 말했다.

".......직접 봐."

두려움과 호기심으로 복도 끝 모퉁이 너머를 바라본다.


               흔들흔들 불빛 아래 온통 붉은 공간.
   강렬한 붉음은 비린내 풍기는 인간의 피.
           공간 안에 널브러진 인간이었던 것들.
       산산조각이 난 파편을 아귀처럼 먹어치우는 기형의 괴물들. 
                         까득까득아작아작으적으적
                뼈 씹는 소리. 고기 씹는 소리.
 아파아파아파!!!살려줘살려줘살려줘!!!!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이건 아직 죽지 못한 자들의 여유로운 비명. 
                   펼쳐진 건 한 편의 정교한 지옥도.
       
                 계속 보겠는가?


후회하며 눈을 돌린다.

다시 치밀어 오르는 공포에 몸을 떨며 입을 막고 헛구역질했다.
골수 깊게 각인된 피 냄새에 정신이 혼미해진다.
이 무슨───.

"괴물들이 건물 안에서도 나왔었어. 수도 적고 대부분 크기도 작았지만 모두 제대로 저항도 못하고 죽었고.
 대체적으로 학교 전체가 이 상태야."

소녀는 무덤덤이 말했다. 제 일이 아니라는 듯, 브라운관 너머의 방관자처럼 혼잣말을 처럼 중얼거렸다.
그 모습이 이질적이라고 느낄 틈도 없이 걸음을 재촉당했다.

"계속 가자고...."

 

잡아끄는 손길. 주저없는 걸음에 이끌려 어둠을 헤치며, 멍하니 계단을 내려간다.
아직도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는 건지 비명과 고함은 끊이지 않고, 어딘가 이질적인 소음이 운동장 저편에서 들려오지만
내 정신은 온통 바로 전에의 지옥도에만 고정되어 있다.

그렇게 굉장히 현실적으로 다가온 죽음이라는 놈이 어깨를 짓누름에 흔들리며 걷다 보면 어느새 3층.
소녀는 곧바로 아무 말 없이 다음 계단으로 향하지만,

"여긴 못 내려가겠는데....."

계단은 부서져 있었다. 흔적조차 없는 계단의 어두컴컴한 저 아래에는 까드득, 뼈 갉아먹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뛰어내릴 수도 없겠네."

"그럼......"

누군가 내 얼굴을 본다면 귀신으로 착각할 만큼 새파랗게 질려 있을 것이다.
길은 없다. 복도는 괴물 천지. 옥상으로 다시 올라가는 것도 떠올려봤지만 내려오자마자 위 층에서 들리는 소리가 심상찮다.
답이 안 나온다.

내가 절망감에 사로잡힐 때, 소녀는 별일 아니라는 투로 시원스레 말했다.

"어쩔 수 없지, 반대편 계단을 사용하는 수밖에."

"무슨 계단?"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대답.

"반대편. 중간 계단은 앞뒤로 포위 당할 수도 있으니까. 아니, 어차피 상관없나?. 분명....."

이윽고 중얼거린 말은 너무 작아 들리지 않았지만, 그보다는 '이런 상황에 너무나 익숙해 보이는' 소녀의 비현실적인 말에 나는 짜증스래 말했다.

"너 바보냐? 저 괴물 천지를 어떻게 지나간다고?!"

검푸른 눈이 나를 찌르듯 본다.

"그래서, 여기에 가만히 있으려고? 다시 올라가려고? 그래 봤자 죽는다는 걸 알면서 그래?"
 
물론 알고말고.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이 현실감각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이성을 유지하라는 거냐!
무섭다고! 겁난다고! 죽기 싫다고! 나는 평범한 학생이란 말이다 젠장 할!

겁에 질려 아무 말도 않은 나에게 소녀는 미소를 띠며 부드럽게 말했다.

"걱정 마 너는 내가 어떤 일이 있어도 지켜줄게.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켜줄게. 반드시. 약속해."

...그건 남자가 해야 할 말이라고.......

나는 이를 꽉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는 한심해지지 말자.
동갑내기 소녀가 이렇게 용기 있는데 내가 겁먹어서야 우습지 않은가.

소녀는 그런 나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맞잡은 손을 당기며 복도로 향했다.

"안 되겠으면 눈을 감아."

그 말에 순순히 눈을 감고 소녀에게 이끌려 걸음을 옮긴다.
질척이는 발밑은 무시하며 복도를 가로지른다.

 

무너진 계단. 꼭 잡은 손. 소년과 소녀, 복도를 건넌다.

그곳은 혼돈이 자리 잡고, 공포가 지배하며, 광기가 날뛰는 곳.

거의 모든 사람들.
도망간다. 도주한다.
쓰러진 사람을 짓밟고, 연인을 밀치고, 친구를 미끼 삼아, 인간은 단지 겁에 질려 달린다.

남은 소수의 사람들.
맞선다. 희생한다.
쓰러진 사람을 일으켜 세우고, 연인은 서로 지키며, 친구와 함께 힘을 합쳐 위기를 넘는다.

하지만, 덧없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 압도적인 재앙에 그들이 보이는 인간다움은, 아름답지만 헛된 몸부림에 불과하다.
비겁한 이들, 용기있는 이들, 너나 할 것 없이 평등하고 공평하게 죽는다. 잡아먹힌다.

절망밖에 없는 상황.
그 와중에도 흔들리지 않은 소녀는, 마법과도 같이 닥쳐오는 모든 위협과 위험을 요령 좋게 피하며 소년을 잡아끌고 앞으로 향한다.

 

"이제 눈 떠도되."

눈을 감고 소녀에게 의지하며 걷고 걷던 중 들려온 목소리에 살며시 눈을 뜨면, 나와 소녀가 반대편 계단에 도착한 것을 깨닫는다.

다행이다. 무사히 왔구나.

긴장이 풀리며 자연스레 한숨이 나왔다. 동시에 의문도 솟았다.

"그런데 어떻게 저 복도를 지났어?"

확실히 뭔가 이상하다. 도대체 어떻게 저 괴물들 사이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지?
단지 18살밖에 안되는 평범한 소년소녀 두 명이?
소녀는 침묵과 함께 시선을 피하며, 이내 굉장히 꺼려하는 기색으로 말했다.

"........요령."

"요령?"

"요령."

"아무리 봐도 요령이라 하기에는...."

이상하지 않나?

말을 끝내기도 전에 더는 묻지 말라는 기색의 공격적인 어조가 귀를 울렸다.

"시끄러워! 살았으면 됐지 뭐!"

"그, 그건 그렇지만..."

고개를 홱 돌리며 강렬하게 쏘아보는 시선에 움츠러들며 겨우 대답했다.
의문은 커지고, 왜 이리 과민반응을 하는 건지도 알 수 없지만, 일단은 입 다물고 있자.

"......"

소녀는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더니 아무 말 없이 걸어갔다. 물론 손은 그대로 쥔 채로.
나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기분으로, 널브러진 사지와 끌려간 듯한 핏자국을 힘들게 무시하며 소녀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이제 남은 계단은 하나─

 

─지만.......

"이쪽으로도 못 내려가겠는데."

우적우적우드득.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는 소리가 가까이서 들려왔다. 소리의 발생지는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한중간.
깜박거리는 형광등 아래를 자세히 보면 통로를 가득체운 듯한 괴물이 등을 우리가 서 있는 쪽으로 돌리고 무언가를 먹는데 심취해 있다.

"또 복도를 가로질러야 하나..."

무심코 손에 힘이 들어갔지만, 공포는 아까보단 덜하다.

내 곁에는 소녀가 있다. 어떤 방법을 사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지옥을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는 소녀가 있다.
소녀가 말했다시피 어차피 살았으니 된 일. 더이상 이것저것 생각하지 말자.

이제는 어딘가 낯선 소녀. 그렇지만 믿겠다는 의미를 담아 바라봤다.
소녀는 그런 나의 눈을 잠시 들여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갈까?"

어깨를 나란히 하고 어두운 복도를 마주 보며 걷는다.
소녀가 있다. 소녀를 믿는다. 소녀가 있으니 안심이다.
....그런데 이 불길함은 뭐지?


──운이 없었다고 할 수 있겠다.


크륵?

계단의 괴물, 미미한 기척을 느끼고 계단의 위로 머리를 돌렸다.

크르륵?

의아함 섞인 울림.
올려다본 계단 위에는 아무것도 없다.
분명히 무언가 있다. 하지만 없다.
단순한 괴물의 머리에 뜬 이상 신호.

계단 위를 본다. 귀를 기울인다. 냄새를 맡는다. 피부로 느낀다.
무언가 있었다.

식욕을 압도하는 호기심.
괴물은 먹고 있던 것을 내버리고 거대한 몸을 움직여 계단 위를 오른다.


하나의 교실을 지났을 때 즈음, 등 뒤에서 걸음 소리가 들렸다. 무겁고 둔중한 것이 땅을 기는듯한 소리.
잘 못 들었나? 라는 생각이 드는 찰나, 소녀가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감각이 좋은 괴물이 있었나...."

"뭐?"

"이제부터 달릴 테니까 손 꽉 잡아."

"무슨 일이야?"

소녀의 긴장이 손을 통해 전해져 왔다. 아까 그 소리 때문에 이렇게 긴장하는 건가?
아니, 그보다 갑자기 왜?

"계단에 있던 괴물이 우리를 쫓아오려고 해. 정신 바짝 차려."

......거짓말할 여유는 없고 농담할 상황도 아니니 사실이겠지.
공포를 느낄 새도 없이 사실은 실질적인 증거로 나타났다.

쿵─!

둔중한 울림. 낮은 으르렁거림. 끈적거리는 살의를 느낀다.
나는 뒤 돌아보지 않았고, 소녀는 외쳤다.

"뛰어!!"

뛴다. 달린다. 고인 핏물을 튀기며, 누군가의 살점을 밟으며 앞만 보고 뛴다.
왜인지 우리를 인식 못 하는 작은 괴물들을 지나쳐, 계속해서 달린다.

─쿵─쿠웅─쿵쿵쿵!!!

땅을 뒤흔들며, 귀청을 울리는, 크고 육중하고 위험한 그것 또한 달려온다.
다른 괴물들과는 달리 확실하게 우리를 인지하며 쫓아왔다.

"─!───!!!!"

고막을 터트릴듯한 괴성은 공포를 닦달하고, 공포는 다리에 채찍질을 가한다.

뛴다. 뛰자!

다리가 무겁다. 숨이 막힌다. 그래도 뛴다. 온 정신을 뛰는 것에 몰아넣으며 달려나간다.
평균보다 떨어지는 허약한 내 몸은 소녀의 짐이 되어 발목을 잡지만 소녀는 잡은 손은 놓지 않았다.

그래서인가, 그런 필사적인 도주도 부질없이 괴물은 순식간에 손 한번 휘두르면 닿을 법한 거리 내로 좁혀왔다.
그리고 인간의 것과 굉장히 흡사한 거대한 팔이 휘둘러짐을 느껴졌다.

죽는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온몸의 감각으로 깨닫는다.
죽음이 가까이 왔노라고.

다가올 고통을 생각하며, 앞선 소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힘을 주어 잡힌 손을 뿌리쳤다.
아까 전과는 달리 땀 때문인지 쉽게 빠져나오는 손.

뒤에 있는 건 나. 그렇다면 먼저 죽는 것도 나. 짐 밖에 안됐던 내가 떨어져 나가면 소녀는 좀 더 쉽게 도망칠 수 있겠지.
그래, 소녀만이라도 살아야지. 괴물이 나를 먹어 치우는 동안 소녀는 충분히 도망갈 수  있을 것이다. 바보 같지만 이게 바로 남자의 마지막
자존심이라는 거다.

라고, 허세를 부려 봤지만, 그냥 체념했다는 거다.

손을 놓은 뒤로 어쩐지 존재감이 희미해져 가는 소녀가, 깜짝 놀라며 돌아보는 게 보였다.
눈이 커다래지며 몸을 돌리려는 소녀. 다시 돌아오려 하는 소녀를 쓴웃음으로 보내고 안녕을 고한다.

벽을 부수며 빠르게 다가오는 괴물의 팔. 그 팔이 느리게 보이는 까닭은 죽을 때라서 그런가 보다라고 생각하며 이를 악문다.

동시에─

난입하는 섬광. 덮쳐오는 불가시의 충격에 앞으로 나뒹굴었다.

넘어지는 와중에 들리는 깨지는 소리. 잘리는 소리. 무수한 단말마.
짧은 시간이 지난 후─ 모든 소음이 멎자 나는 고인 핏물에 피투성이가 된 몸을 일으키며 주춤주춤 뒤를 돌아봤다.

처음 보이는 것은 휘두르는 게 가능하기나 한 것인지 의심이 되는 무식한 검.
시선을 아래로 돌리면 검 날 아래 전신이 토막 난 괴물의 일부.
위로 올리면 검을 쥐고 여유롭게 웃고 있는 '사내'

너무 비현실적이다. 황당하고 어처구니없고 웃음이 나올 정도로 비현실적이다.
아니, 애초에 괴물부터가 비현실. 비현실에 비현실이 더해진 상황인데 칼을 휘두르며 괴물을 잡는 인간 같은 게 나오는 것이 되려
당연하고도 뻔한 순서가 아닌가 싶다.

멍하니 서 있는 내게 사내는 조금 경박하게 말을 걸었다.

"오우오우, 아직 생존자가 있을 줄 몰랐는데?"

어쩐지 사람 짜증 나게 하는 어조다.

"다, 당신은 뭡니까?"
 
"지나가던 사냥꾼이다!"

말을 내뱉고서 어쩐지 기뻐 보이는 기색인 자칭 사냥꾼 사내.
이 말 정말 해보고 싶었어. 라는 중얼거림이 들려왔지만 무시했다.

"사냥꾼?"

"보시다시피 이런 괴물을 사냥하는 사람이지. 그보다 옆은 여자친구?"

손에서 다시금 느껴지는 따뜻함. 슬며시 옆을 바라보면 어느새 돌아온 소녀가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내 손을 단단히 쥐고서
사내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런 소녀의 손길에 안도하며 말을 이어나간다.

"그냥 친구입니다. 그보다, 지금 이 상황에 대해 뭔가 알고 있습니까?"

사냥꾼이라 했다. 괴물을 전문적으로 사냥하는 사냥꾼.
그렇다면 지금 학교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비정상적인 사태와 같은 일이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는 말.
눈앞의 사냥꾼은 이 일에 대해 분명히 무엇이든 알고 있을 것이다.

"흐음, 친구인 건가.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질문에 답해줄 이유도 없고, 의미도 없고 하니, 나는 이만 가보련다."

땅에 박힌 대검을 뽑아 어깨에 걸치는 사냥꾼.
나는 다급히 소리쳤으나 사냥꾼은 무시하며 창문으로 몸을 던졌다.

"잠깐!...."

"아하핫, 더이상 사냥감을 뺏기면 곤란하다고! 그럼 열심히 발버둥치라고 소년!"

연이은 괴물의 비명이 아련히 들려온다.


"괜찮아?"

황망히 서 있는 나에게 굉장히 걱정하는 기색으로 묻는 소녀.
소녀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며 더듬더듬 말했다.

"아....아아, 으응. 괜찮아..."

"그래? 다행이다....."

소녀는 진심으로 안심한 듯, 한숨을 내뱉었다. 이윽고 화냈다.

"그런데 도대체 왜 그랬어?"

"뭐, 뭐가?"

움찔하며 대답하는 나. 소녀는 눈을 치켜뜨며 거칠게 말했다.

"손 놓은 것! 포기한 것! 안 봐도 뻔하지, 혼자 죽으려 했지? 왜 그랬어?!"

그거 때문이었나? 아니, 그럼 그 상황에서 같이 죽었어야 했다는 말이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그게 왜?! 난 당연한 행동을 했다고. 한 사람이라도 살아야지, 안그래?"

"안그래!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고 약속했잖아!"

그런 약속한 적 없다!

"뭐야, 그게? 우리가 무슨 부부냐? 연인이야? 바보야!"

소녀의 얼굴이 빨개졌다.
이런, 제대로 화났나?

"시, 시끄러워! 하여튼 이제 절대로 손 놓치마! 알았지?!"

그야말로 백수의 왕 같은 기세다. 나 같은 건 그냥 잡아먹을 것 같다.
분노에 올라갔던 목소리가 자동으로 수그러들며 나왔다.

"그, 그래 알았어. 알았다고."

소녀는 내 대답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잡아끌었다.

"그럼, 가자!"

붉은 얼굴로 앞장서는 소녀와 한숨을 쉬며 질질 끌려가는 나.
남은 건 한 층. 복잡한 것, 의문이 남는 것, 이것저것 남겨두고 당장 닥친 일에 집중하여 어둔 길을 걷는다.

 

1층. 반대편 계단을 통해 내려온 이곳에는 괴물 같은 건 없었다. 시체도 없고, 있는 건 단지 약간의 파괴된 잔해뿐.
밖이 소란스러운 것을 보면 괴물들이 아직 돌아다니고 있다는 거겠지.

"그런데 이제 어디로 갈 거야?"

자, 1층까지 내려왔다. 당연, 학교를 벗어나기 전에는 안전하지 않고, 도주할 길에는 괴물들이 배회한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어떻게 해야 하나.

"담을 넘자."

"엉?"

"담 넘고 산을 타 넘으면 주택가가 나오잖아? 그러면 운동장을 지날 필요가 없지."

"안개는?"

"걱정 마. 학교 뒷산은 눈 감고도 넘을 수 있어."

아, 그러십니까.
별 달리 방도도 없으니 이제껏 그랬듯 소녀의 말을 따르기만 하면 되겠지.

"자자, 움직이자."

소녀는 기운차게 팔을 휙휙 휘두르며 출입문을 나선다.

그리고 나는, 내 몸은, 건물 안으로 밀쳐졌다.

어라?

절대로 놓지 말라던 소녀의 손을 놓치고 강한 힘에 밀려나 뒤로 넘어지며 출입문을 바라보면, 보이는 건 소녀의 다급하면서도 안도에 찬 표정.
엉덩방아를 찧은 것에 대해 소녀에게 불평을 토로할 새도 없이, 무슨 일인지 물을 새도 없이,
눈앞에서 진행되는 상황에 언어를 자아내는 걸 잊었다.

"──?"

소녀의 등 뒤로 보이는 검은 거체. 타의에 의해 허공을 날아 소녀와 출입문을 짓뭉개고, 부서며, 박살 냈다.

아─

팍─하고 퍼지는 피. 충격에 의해 으스러진 소녀의 육체. 대부분은 괴물의 몸 아래 깔려있고 일부만이 방사형으로 비산하여 흩어져 있다.

아아──

출입문의 부서진 파편이 머리를 스치고 떨어졌다. 화끈한 통증과 함께 머리에서 피가 새어 나왔다.
그러나 그것에 신경 쓸 정신은 남아 있지 않다.
왜냐면,

아─아아아───!!!

소녀는, 소녀가 죽었으니까.
정신이 비명 지른다. 현실을 따라잡지 못한 육체는 사건이 멈춘 듯 굳어 있고 정신만이 빠르게 반응했다.

우두커니 주저앉아 눈앞의 현실을 외면하고 싶은 나에게 소녀의 일부였던 검푸른 눈 하나가 붉게 물들어 데굴데굴 굴러 와 눈빛으로 물었다.
'너는 괜찮니?' 하고.....

"아─아아아아아악!!!!!"


깨닫는 게 늦은 소년의 비명이 어둠과 안갯속에 애처롭고 구슬피 울려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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